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데 전쟁 (문단 편집) == 전개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80px-CuoreVandea2.svg.png|width=100%]] || || 봉기군의 상징 '''성심'''(聖心, Sacred Heart)[* 성심(聖心)은 '거룩한 사랑의 마음'이라는 뜻으로,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을 지칭한다. '예수 성심'은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성탄 대축일|강생]]과 [[주님 만찬 성목요일|성체성사]], [[주님 수난 성금요일|수난과 죽음]]으로 드러난 예수의 사랑의 마음을 가리킨다. '성모 성심'은 [[야훼|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이바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일컫는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예수 성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톨릭]]대사전 참조) [[라틴어]]로는 Cor Sanctissimum, [[영어]]로는 Sacred Heart라고 한다. 간혹 이 깃발 위에다 '''Dieu et le Roi([[야훼|하느님]]과 왕을 위해)'''라는 문구를 적기도 했다. 이 상징은 오늘날 [[https://en.wikipedia.org/wiki/Vend%C3%A9e#/media/File:Flag_of_Vend%C3%A9e.svg|방데 주의 깃발]]과 [[https://en.wikipedia.org/wiki/Vend%C3%A9e#/media/File:Blason_d%C3%A9partement_fr_Vend%C3%A9e.svg|문장]]에도 반영되었다.] || [[프랑스 혁명 전쟁]]이 한창이던 1793년 2월 프랑스 혁명 정부가 30만 징집령을 선포하자 원래 혁명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 서부의 농민들이 징집령에 저항해 최초로 봉기했다. 3월 11일 징집관이 방데에 나타나자 농민 시위가 전개되었고 농민들이 관리와 병사들을 내쫓는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대부분 지역은 정부군이 쉽게 진압을 했으나 루아르 강 이남 지역에서는 상황이 크게 달랐다. 숄레에서는 마을 청년들이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린치해 살해하는가 하면 마쉬쿨에서 수백 명의 공화파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정부는 서부 지역에 진압군 45,000여 명을 파견했다. >내가 전진하면 나를 따르고, 내가 후퇴하면 나를 죽이고, 내가 죽으면 내 복수를 해 달라. >----- >앙리 라로슈자클랭 후작.[* 방데 봉기 당시 현지 총사령관으로 지휘를 맡아달라는 농민들의 요청을 수락하면서 했던 말로 알려져 있다. 라로슈자클랭 후작은 이후 공화정부군과의 전쟁에서 전사했다. 이때 후작의 나이는 21세였다. 앙리의 동생인 루이 드 라로슈자클랭은 형의 친구인 루이 마리 드 레스퀴르 후작의 전 부인 마리 루이즈 빅투아르 드 도니상(Marie Louise Victoire de Donnissan)과 결혼했는데(레스퀴르 후작은 방데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전사했다) 마리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 속에서 자신이 보고 겪었던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방데 전쟁에 대한 회고를 남겼고 이 회고록은 방데 전쟁에 관한 중요한 1차 사료로 꼽힌다.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으므로 관심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052672?LINK=PDM|#]] 마리는 방데 전쟁 이후 1794년 10월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공포정치가 끝나 사면되었으며, 왕정복고 이후 [[루이 18세]]를 알현하기도 했다. 1857년 2월 15일에 85세로 사망했다.] 진압군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소요는 순식간에 서부 전역으로 퍼졌다. 행상인 출신 자크 카텔리노(Jacques Cathelineau)가 이끄는 15,000여 명의 봉기군이 방데의 주요 도시인 숄레를 장악했으며 이에 방데의 귀족 출신 왕당파 장교들이 가세했다. 스스로를 "왕실과 [[가톨릭]]의 군대"라고 칭한 이들은 정부군을 몰아내면서 서부 지역 각지에서 봉기한 농민들과 세력을 합치기 시작했다. 농민군은 국왕의 색깔인 흰색 휘장을 둘렀기 때문에 백군(白軍)이라고 불렸고 혁명군은 국민방위대의 복색인 청색을 따서 청군(靑軍)으로 불렸다. 백군은 앞에서 소개된 사진의 붉은색 심장 위에 십자가가 그려진 표식을 착용하기도 했다. 혁명 정부와 국민공회는 "왕당파의 휘장을 착용한 이들과 손에 무기를 든 모든 반란자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하고 진압에 나섰으나 3월 19일 샹토네, 22일 샬롱쉬르루아르 전투에서 패배했다. 심지어 이들 백군은 보카쥬(빽빽한 잡목림)라는 지역 특성 때문에 농민들은 전투 끝나면 다시 밭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또 전투 시작되면 나가 싸우는 등 불리한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했다. 정부는 3월 23일부터 봉기에 대해 방데 및 인근 주의 전쟁(La guerre de vendée et des département circonvoisins)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며 방데, 루아르앵페리외르, 멘에루아르, 되세브르의 4개 주를 방데 군사지역(Vendée militaire)으로 지정하였다. 청군은 4월에 숄레 탈환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백군의 기세는 5월에 들어서면서 더욱 거세져 6월까지 지역 거점인 투아르, 퐁트네르콩테, 앙제, 소뮈르를 점령하는 등 승전을 거듭했고 방데를 넘어서 루아르 강 이남의 인근 주까지 세력을 크게 넓혔다. 이 시점에서 정부가 통제하고 있던 루아르 지방의 도시는 낭트와 레자블돌론 2개뿐이었다. 6월 29일 봉기군은 루아르 지방의 최대 도시이자 항구인 낭트 공략에 나섰으나 봉기군을 피해 낭트로 피난 온 공화파 시민들의 결사항전으로 전투에서 패하고 자크 카텔리노가 전사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그러나 7월 백군은 샤티옹, 비에 전투에서 또 다시 청군을 격파했다. 8월 1일 정부는 반격을 시작하며 장바티스트 카리에(Jean-Baptiste Carrier)에게 방데 일대의 초토화작전을 통한 "평정"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방데인들에 대한 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와 더불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이었던 마인츠에서 병력을 대거 빼내 진압에 투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군의 세력은 여전히 왕성하였다. 루송에서는 1개월에 걸친 3회의 전투 끝에 청군이 승리하였으나 티포주, 몽테쥐 전투에서 패배해 백군에 붙잡힌 청군 포로들이 백군에 의해 참수당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을 경험한 새 진압군은 기존의 진압군과 차원을 달리했다. 백군은 10월 15일 트렝블레, 17일 숄레 전투에서 대패했고 살아남은 백군은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지역의 봉기군과 합류해 영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백군 25,000여 명과 학살을 피해 도망친 주민 10만 명은 루아르 강을 건너 목적지인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그랑빌로 이동했다. 이들은 11월 14일 그랑빌을 포위 공격했으나 그랑빌의 청군에 패하면서 '갈레른 회군'이 시작되었다. 회군 도중 수천 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다시 남하하던 백군은 12월 12일 르망 전투에서 대패했다. > 여기(르망)에서 방데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것은 불가피했다. 우리가 여자들, 아이들, 노인들을 데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역으로 피신하기 위해, 어느 길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채, 게다가 겨울이 시작되는 시점에, 루아르 강의 좌안을 떠났을 때부터 우리가 이러한 끔찍한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내다볼 수 있었다. (방데군의) 장군들과 병사들이 받을 가장 아름다운 영광은 그것을 오랫동안 늦추었다는 것이다. >----- >마리 루이즈 빅투아르 드 도니상의 회고록에서 잔존 세력은 루아르강 남쪽으로 철수했으나 12월 23일 루아르 강 북쪽의 사브네에서 미처 도강하지 못한 백군이 따라잡혀 전멸당했으며 포로와 민간인 수천 명이 '''루아르 강에 산 채로 던져져''' 죽었다. 이로써 대규모 전투 세력으로서의 백군은 와해되었고 이후 전투는 게릴라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1794년 2월부터 혁명 정부는 방데 보복(Vendée-Vengé)이라는 "평정" 명령의 최종 단계를 집행해 '지옥종대(colonnes infernales)'를 파견하여 파괴와 학살을 가했고 주요 인물들에 대한 체포와 처형을 집행했다. 1794년 1월부터 4월까지 방데에서는 50,000여 명이 지옥종대에게 살해당했으며 앙주에서는 15,000여 명이 포로로 잡혀 그 중 절반 이상이 처형되었고, '''그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전투는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나 정부군의 승리는 명확했고 마지막 백군 지도자 샤레트 드 라 콩트리(Charette de La Contrie)도 1796년 3월 26일 총살되었다. 이후 정부는 신앙의 자유 보장과 초토화 작전으로 인한 재산 피해를 일부 배상하는 등 유화책을 제시하였다. 1795년 7월 20일 펭티에브르 요새와 퀴베롱에 상륙했던 백군이 패배했고 1796년 7월 16일 방데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전되었다. 7월 30일에는 반란 지역들에 대한 봉쇄 조치가 해제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방데 부흥 정책을 제시하고 교황청과 화해한 1801년을 방데 전쟁이 끝난 해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1815년, 1831~1832년까지 한동안 종종 소규모 봉기들이 일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